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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동아시아 고전학의 방법 제59회
문자세계의 프론티어

일시
2019년11월9일 (토) 10:30
회장
도쿄대학 고마바캠퍼스 18호관 콜라보레이션 룸3

기본정보

개요

 「동아시아 고전학」이란 한자문을 읽고 쓰는 것을 축으로 하는 권역에서 생겨나 읽혀진 「고전」에 대해서 그 형성・독해・변형・학습 등의 실천을 총체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읽고 쓰는 권역으로서의 「동아시아 고전세계」의 구조를 해명하고 그 역사를 기술하여, 지견을 공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가켄연구비의 보조를 받으며 진행해 온 이 프로젝트는 금년도부터 「「국제협동에 의한 동아시아 고전학에 차세대 전개──문자세계의 프론티어를 시점으로」(기반A)로서 새롭게 시작하였습니다. 이 프로젝트에서는 특히 「문자세계의 프론티어」 즉 어느 문자세계가 비문자세계 또는 다른 문자세계와 경계를 접하는 영역에 시점을 두고 한자문 이외의 서기도 포함한 다양한 사상(事象)을 검토하면서 그 생성과 구조의 메커니즘을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번 세미나는 그 첫 이벤트로서 프로젝트 멤버에 의한 각자의 연구 및 시점에 의한 대화를 축으로 프로젝트의 과제에 대해서 토의합니다.)


프로그램
종합사회 사이토 마레시(도쿄대학)

10:30-12:00 제1세션 
「신공황후기(神功皇后紀)라는 통로」가네자와 히데유키(홋카이도대학) 
「일본서기주석에 있어서 와고(和語)의 역할」도쿠모리 마코토(도쿄대학)

13:30-15:00 제2세션 
「가나문 안의 마나(真名)」다무라 다카시(도쿄대학)
「『일본서기』의 노래에 있어서의 가나표기의 문제」바바 사유리(데이쿄대학)

15:15-16:45 제3세션 
「일본 전존의 왕발 작품과 출토 묘지(墓誌)―당대초기의 문학의 기반에 대해」미치사카 아키히로(교토대학)
「문자세계의 외부로서의 「이니시에(古)」」사이토 마레시(도쿄대학)

주최

국제협력에 의한 동아시아 고전학의 차세대 전개──문자세계의 프론티어를 시점으로

당일레포트

 금년도부터 시작된 가켄 「국제 협력에 의한 동아시아 고전학의 차세대 전개──문자 세계의 프런티어를 시점으로」의 킥 오프 이벤트로서 프로젝트의 멤버에 의한 발표와 토의를 실시하였습니다.
 
 아래에 참가자의 리포트를 게재하고자 하며, 게재시 내용의 일부를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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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세션]
 
 가나자와 선생님의 발표는 『니혼쇼키(日本書紀)』의 신공황후기를 들어 중세의 『하치만구도쿤(八幡愚童訓)』처럼 신공황후기(설화)를 바탕으로 한 텍스트가 탄생하게 된 계기를 『니혼쇼키』의 기술 그 자체에서 찾으려고 한 것이다. 먼저 신공황후기가 『위지(魏志)』왜인전 및 『진기거주(晋起居注)』와 관련지어 기록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니혼쇼키』의 기년의 기준점으로 간주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신공황후기가 『니혼쇼키』에 기록된 역사를 세계사의 시간에 접속하는 통로로서 기능하였음을 논하였다. 신공황후 설화는 『니혼쇼키』이외의 문헌도 포함하여 다양한 형태로 언급되는데, 예를 들면 계체기(継体紀) 6년 12월조에서는 「스미요시노 오호카미(住吉大神)가 바다 건너 금은의 나라, 고려, 백제, 신라, 임나 등을 하라노 우치의 호무타텐노에게 하사하였다」라고 하는 것처럼, 실제로 행동한 신공황후 본인이 아니라 그 아들 오진(応神)의 업적으로 언급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발표 후 토론에서, 헤이안시대까지는 신공황후 본인이 이미지화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그 이후는 오진(応神)의 업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하치만구도쿤』에 보이는 것과 같은「하치만(八幡)」과도 결부되어 갔다고 논하였다.
 도쿠모리 선생님의 발표는 중세까지의 『니혼쇼키』주석 전개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우선 『니혼쇼키』에 분주의 형식으로 삽입되는 일본어의 훈주가 맥락에 입각한 것이며, 서기의 서술 전체를, 일본어의 서술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다음으로 헤이안시대의『니혼쇼키』강서에 있어서는 모토오리 노리나가처럼 한자 표현에 구애받지 않고「고언(古言)」으로 회귀하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한자로 쓰여진 텍스트로서의 『니혼쇼키』를 존중하면서 훈독하고자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치조 가네요시(一条兼良)의 『니혼쇼키산소(日本書紀纂疏)』에서 와훈을 묻지 않는 서기주석 ·이해가 이루어진 것을 언급하고 그것이「와훈의 기능을 바꾼」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후 토론에서, 헤이안시대의 강서가 한어(의 와훈)를 통해 서기의 정합적 해석을 도모하는 것에 비해, 『산소』나 요시다 가네토모(吉田兼倶)의 『니혼쇼키진다이노마키쇼(日本書紀神代巻抄)』는 일본어에 의한 해석 공간을 만들어내고, 그 결과 한자세계 밖으로 뻗어나가는 세계로 이어져 있었다고 하는 보충설명이 있었다.
 
 「『니혼쇼키』주석에 있어서 일본어」라고 것에 대해서 특히 「일본어에 의한 서술」문제에 흥미를 가졌다. 고대 일본어의 문제로 생각하면, 거기에는 서기언어와 음성언어가 있으며, 일본어에 의한 문장=일본어문·가명문은 후자, 당시의 일상 회화어에 가까운 것이었다는 국어학에 있어서의 지적이 상기되어 온다. 『니혼쇼키』성립시의 일본 즉 나라시대에 있어서, 「일본어를 서술하는 것」이 과연 가능했던가(만약 부분적으로 가능했다고 해서, 그것은 도대체 얼마나 가능했는가), 이 문제는 복잡하고 난해하며, 「어(語)」보다 큰 단위의 「문장・문체」사의 관점에서도 다양하게 고찰되어 온 것이기도 하다.
 다만 일본어를 「(정격) 한문」을 매개하지 않고 적는 것은 예를 들어『만요슈』와 같이 노래 표현에 한해서만 행해질 수 있는 행위였던 것 같다. 음성언어에서는 당연히 이용되었을 일본어가, 직접 서기언어의 형태를 취하고, 또한 어느 정도 일정한 분량으로 서술되게 되는 것은, 헤이안시대의 일본어문·가명문의 성립을 기다려야 했다.
 이러한 일에 대해 생각해 볼 때 고마쓰 히데오 씨의「중요한 것은 가나가 탄생함에 따라 가나문이 발달한 것이 아니라 가나문을 쓸 수 있도록 가나가 발달한 것이다.」(『일본어서기사원론 보정판』제1장「가나문의 발달」)라는 지적은 다분히 시사적이다. 현시점에서는 이 지적의 옳고 그름를 판단할 만한 재료를 갖고 있지 않지만, 「쓰는 것」=서기 행위와 「쓰이는 것」=원텍스트의 관계를 생각해 가는데 있어서 염두에 두어야 할 시점이다.
 또한 발표 후의 토론에서 (고정적인 텍스트가 아닌) 유동적인 「구전」은, 서기 행위에 의해서 처음으로 「이 텍스트에 있어서는」이라고 고정화된다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논의는 와타나베 미노루 씨의 「문장이란 서기언어로서의 닫힌 언어세계를 구축하는 것일 것이다. 구두언어의 형태로 주어진 내용을 서기언어로 전환시킬 때 문장의 파악하는 방법의 차이에 따라 닫힌 언어세계를 만드는 방식에 분명한 차이를 발생시키는 것 또한 사실이 아닐까」(『헤이안 시대의 문체사』)라는 지적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며, 음성·구두라는 형태로만 언급되어 온 것이 텍스트에 있어서 고정화=변환될 때에 도대체 무엇이 발생하는(혹은 멸한다)가 하는 문제의식과 겹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와노 도모야 홋카이도 대학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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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세션]
 
 다무라 선생님의 발표는 헤이안 시대 이래, 가나로 쓰여진 이야기의 대표작인 『겐지모노가타리』『우츠보모노가타리』『마쿠라노소시』『에이가모노가타리』등을 들어 사본의 마나 표현 방법이나 사본의 전후 관계, 작자가 마나를 파악하는 방법을 검토하는 것이었다. 먼저 『겐지모노가타리』에서 최고본이 될 가능성이 있는 후지와라 사다이에의 자필본을 소개하고(교토신문 게재자료), 시대가 지날수록 사본에 한자가 늘어나는 경향을 오시마본과 도쿄대학본에 근거하여 지적하였다. 다음으로 마나 표기의 사례로『마쿠라노소시』를 들었고,『백씨문집』의 한시 한 구절이 삼권본에서는 그대로 인용되었으며, 노인본에서는 훈독하여 인용되고 있음을 논하였다. 또한 삼권본과 노인본의 성립 전후 관계에 대하여, 노인본이 삼권본처럼 한자 표기가 될 가능성은 생각하기 어렵다는 점,  삼권본에서 「뜻하지 않게(おぼえず)」라고 되어 있는 노래가 노인본에서 주석적으로 추가되어 있는 점을 통해 삼권본 다음에 능인본이 성립하였다는 점을 기술하였다. 마지막으로 마나가 가나문 안에서 어떻게 다뤄질지를 엿볼 수 있는 사례로 『겐지모노가타리』와 『무라사키 시키부 일기(紫式部日記)』가 소개되었다. 『겐지모노가타리』에서는 등장인물의 대사를 빌어 한자세계에 있는 아카시노뉴도(明石入道)에 대한 비아냥거림이 나타나고 있고, 또한 『무라사키 시키부 일기』에서는 「마나를 휘갈겨 쓰다」라는 표현에서 한자세계를 조롱하는 무라사키 시키부의 태도를 볼 수 있다고 논하였다.
 바바 선생님의 발표에서는 전체적으로 한문으로 쓰는 것을 목표로 한 『니혼쇼키』에서 「노래(歌)」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가 다뤄졌다. 『니혼쇼키』도 『고지키(古事記)』도 「노래는 한자의 소리에 따라 한 자 한 음으로 쓰인다」. 그러나 한문으로 쓰여진 『니혼쇼키』와 일본어가 상정된 형태로 쓰여진 『고지키』에서는 노래와 산문의 관계, 그리고 노래에서의 한자의 용법이 다르다. 바바 선생님은 거의 같은 가사로 실리는 「아사지바라(浅茅原)」를 예로 들어 각각의 노래와 산문의 관계, 그리고 한자의 용법이 어떻게 다른지를 밝혀내면서 기존 연구에서 지적되어 온 점에 의문을 던졌다. 구체적으로는 일찍이 모토오리 노부나가 지적했던 『고지키』의 노래와 산문의 모순관계라는 것은 모순이 아니라 『고지키』의 노래는 산문 서술을 정서적으로 끌어올리는 것으로서 산문과 길항관계에 있음을 지적하였다. 또한 노래에 사용되는 한자의 선택방식이 『니혼쇼키』와 『고지키』에서 다르다고 하는 종래의 지적을 더욱 발전시켜, 음의 표기라는 문제가 전자에서는 일본어의 표기 시스템 밖에 있는 문제로서, 후자에서는 일본어 표기의 문제로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했다.
 
 다무라 선생님과 바바 선생님의 발표는 「어떤 문자를 주체로 하는 텍스트」 에서의 「주체로 나타나지 않았고 다루어지지 않은 측면」에 주목하고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고찰한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제2세션은, 확실히 문자 세계의 변경 지대에 대해, 그것을 어느 한 쪽에 고정하지 않고, 그대로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 시도였다. 보고자가 공부 부족에 문외한이기 때문에 준비해 주신 자료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 부분도 많지만 두 분 모두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과거의 텍스트에 대해서, 그 적힌 시기와 작가 그리고 전후 관계 등의 문제에 대해서 하나의 답을 찾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했다, 심지어「쓴다」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다무라 선생님의 발표에서 다루어진 것은 가나가 주체가 되어 쓰여진 모노가타리다. 그 안에 끼인 마나란 무엇인가. 이는 여러 가지 모노가타리들이 다양한 계열의 사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본에 대한 지식이 먼저 전제되어만 답할 수 있는 질문이다. 다무라 선생님이 이번 발표에서 제시한 힌트는 시기가 지남에 따라 삽입되는 한자도 증가한다는 지적과 이야기의 성격에 따라 예를 들어 한시문을 피하는 『겐지모노가타리』에서는 한자가 가나문에 삽입되는 경우가 드물고, 역사모노가카리인 『에이가모노가타리』에서는 작중의 인물이 읽었다고 하는 한문이 실제로 남아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인용하는 부분이 많다고 하는, 모노가타리의 성질에 따라 마나가 늘어난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모노가타리류에서는 원래 원텍스트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상정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마나가 늘어 가는 시점 등을 확정하는 것은 어렵다는 지적도 중요한 포인트였다. 또한 반대로 원본 그 자체가 한자가 늘어난 것이라고 생각되며, 게다가 훈독해 가는 작업도 이루어졌다는 지적은 매우 흥미로웠다. 이와 관련하여 제시해주신 규슈대학 소장본 『우쓰호모노가타리 에마키』의 예는 흥미롭고, 한자가 증가했다는 전제하에 다시「가나문」에 「열어 가는」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지적은 「모노가타리」가 가진「카테고리 의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을 상상케 한다. 씀으로써 무엇인가를 단순히 전달하는 것이 아니며 읽는 사람의 시인성(視認性) 등의 기능의 문제를 단순히 고려하는 것도 아니고, 모노가타리의 에마키를 만드는 행위 자체가 작자의 카테고리 의식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또한 바바 선생의 발표도 「쓰기」의 의도에 따라 달라지는 문자의 선택이나 파악하는 방법의 차이에 대해 접근하는 것이었다. 현재는 『니혼쇼키』와 『고지키』가 어떻게 다른지, 예를 들어 정사를 세우려고 하여 기전체로 쓰여진 전자에 대해, 국내용으로 모노가타리도 많이 포함한 것이 『고지키』라고 하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원래 물질로서의 텍스트를 보면, 양쪽 모두 구두점이나 반환점이 없는 한자로 쓰여져 있다. 바바 선생님의 문제의식은 여기서 출발해 같은 표기로, 같은 노래가 왜 다른 차원을 만들어 내는가 하는 물음을 제시한다. 특히 『고지키』에서 산문과 노래의 관계가 모순이 아니라, 각각 맡은 영역이 길항관계로 병존한다는 지적은 매우 흥미로웠다. 더욱이 『고지키』에서는 매일 방울을 울리며 오키메(置目)를 부르는 텐노가 그려지는 산문과 「텐노로서의 덕과 자애」가 방울의 울림으로 정서화되는 노래 부분이 공존하기에 작품으로서 정합성을 갖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반면 바바 선생님의 지적대로 『니혼쇼키』에서는 「산문이 노래 내용을 앞서 노래의 해석을 제시해 나간다」고 한다면 『니혼쇼키』에 굳이 노래가 삽입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도 생긴다. 이 문제는 바바 선생이 마지막으로 「『니혼쇼키』의 노래를 단순히 한문용법 속에 포섭되는 가차로 파악되는 것과는 다른 대응이 요구된다」고 지적한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허지향 리쓰메이칸대학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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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세션]
 
 도사카 씨의 보고는 쇼소인(正倉院)에 일문(佚文)으로 전해지는 묘지가 후세 묘지의 사구(辞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단서로 7~8세기 중국 지식인층의 표현양식의 특색을 고찰한다. 아래에 그 개요를 적고자 한다.
 쇼소인에 남아 있는 왕발(王勃, 650~676)의 〈당의 하동처사 고위모의 부인 하발씨의 묘지병서〉 (왕발이 촉에 부임해 있던 669~671년 작성으로 추정된다)의 사구와 〈주의 부군 고백선덕의 부인 배씨의 묘지명〉(701년)는 거의 유사하다. 원래대로라면 영향관계가 지적되겠지만, 도사카씨는 ①표현이 매우 비슷하고 ②탁본이 너무 깨끗하여 후자의 묘지병서의 사료비판을 행한다. 탁본의 위조는 그 가치를 인정받은 중화민국 초엽부터 활발해진 듯하다.
 〈주의 부군 고백선덕의 부인 배씨의 묘지병서〉는 1931년에 출토되었다. 구장자인 장방(張鈁)은 1931년 당묘지를 수집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이 묘지는 수습 초기에 구했기 때문에 위조라고 보기 어렵다. 또한 당시의 측천문자가 올바른 연차 비정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 외에, 돌과 함께 남아 있는 탁본의 수도 많지 않다(위조를 해서 매각한다면, 더욱 탁본이 많을 것이다). 더욱이 당묘지는 북위(北魏)의 것이 가벼운 데 비해 무겁고 인기가 없어 당시 돌을 새기면서까지 위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점으로부터 이 묘지는 위조된 것이 아니라 왕발의 〈당의 하동처사 고위모의 부인 하발씨의 묘지병서〉의 영향을 짙게 받은 당시의 묘지인 것이다.
 왕발에는 그 밖에 〈귀인현주묘지〉라는 작품도 있다. 귀인현주는 이연(李淵)의 손자. 아버지가 이세민(李世民)에게 살해당했기에 이 묘지가 유일한 역사적 흔적이다. 이 작품의 유사한 대구를 사용한 묘지가 여러 개 있어 왕발의 시문이 동시대에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왕발과 동시대의 묘지로는 양형(楊炯, ?~692년)이 저명하다. 양형의 여성 묘지는 두 편이 남겨져 있는데, 그것은 남편을 잘 섬겼다는 것을 말하고 또 남겨진 남편의 슬픔을 표현하는 대목도 있다. 한편 그 이전의 유신(庾信, 513~581)은 부인이 속한 집을 표현하며 비문 작자로서 애도의 뜻을 표하였다.
 이에 비해 왕발은 아내로서의, 어머니로서의 부인을 표현하며 비문 의뢰인의 슬픔을 대변한다. 거기에는 남겨진 자의 슬픔 표현이라는 특색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관계에 근거해 도사카 씨는 왕발의 시문이 동시대에 이토록 유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그 파급의 형태는 ①(선호되는 표현 방법 등이 있고) 유행 작가였기 때문에, 이만큼 따라한 것이었을까 ②따라하는 이가 많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게 되었을까 하는 두 가지 패턴을 생각할 수 있다고 한다. 육조시대 말기~초당에는 유신이 인기 작가였는데, 왕발은 왜 유행했을까?
 원래 변문(駢文)은 어느 정도 형식을 지키고 전거를 잘 모으면 문학적 재능이나 신규성과는 상관없이, 형태가 잡힌다는 것이다. 작성의 모범 예문집까지 존재했을 정도다. 여기에 하급 지식인의 살롱을 상정할 수 있다고 한다.
 육조시대부터 초당에 걸쳐 사회구조가 크게 변화한다. 그에 따라 먼저 당나라 때 새로 묘지를 만드는 계층이 등장하였고, 이들은 새로운 문학적 표현을 원하였다. 그것은 예를 들면 한유가 그런 것처럼「집」보다 남편과 아내, 그리고 아이라고 하는 것처럼 표현의 중점이 새로운 지식인의 가치관과 함께 변하였다. 이는 지식인의 존재 형태와도 연관되어 있어 육조시대 문학자들의 생활은 묘지 등의 사례금에 의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묘지 제작 특권 신분인 귀족의 요망에 부응하지 못하면 다음의 의뢰가 온지 않기 때문에 종속적이었다. 하지만 신흥 부유층의 대두로 인해, 이들도 묘지를 원하였다. 하급 지식인들도 독창성은 없지만 일단 글을 짓어 대응하였다. 왕발 시문 유행의 원인은 이것들로부터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도사카 씨는 육조~초당의 문학양식의 변천을 사회구조나 지식형태와 연동시켜 이야기하였다. 역사학과 문학은 역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고 생각되었으며, 관료의 지방부임에 따른 문학의「장(場)」이나 지식인의 귀현(貴顕) 및 민중과의 존재에 대한 관계성 등 율령의 본고장에 대한 연구 성과에 배울 수 있는 점이 많다고 느꼈다.
 또한 도사카 씨는 왕발의 작품이 일본에 수용될 때 지금까지 기술되어 온 것과 같은 감각과는 다소 다르게 수용된 점도 지적하였다. 당의 문물이나 제도가 일본에 들어왔을 때 꼭 원래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종종 일어났던 것이며, 그런 점에서도 이번 지견(知見)은 다른 분야에도 응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이토 씨는 「고시(古詩)」란 어떠한 것인가라는 역사적인 변천을 확인한 후 시작(詩作)에 있어서 「의고(擬古)」를 행하는 것, 그리고 「고의(古意)」의 시를 만드는 것이 도대체 어떠한 행위였는지에 대해 고찰하고, 「고(古)」의 개념이 어느 정도 규범성을 가지고 창작의 어떠한 원리로 되어 있었는지에 대해 해명을 시도한다. 아래에 그 내용을 개관하고자 한다.
 「고시」는 일반적으로 후한시대에 낙양에서 성립된 것인데, 사이토 씨의 주안점은 그것이 어떻게 성립하였는가보다 어떻게 「고시」로 묶는 것이 가능했는가였다. 우선 시문집에서는 『문선(文選)』이나 『옥대신영(玉臺新詠)』에 「고시」라는 범위가 있다. 그 의미의 변천에 있어서는 『한서(漢書)』예문지에서는 「한 이전의 옛 시」, 『열자(列子)』에서는 「누가 지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옛부터 전해지는 말」, 『예기(礼記)』(학기)에서는 「규범적·교훈적인 운문」, 『세설신어(世説新語)』(문학)에서는 「한대의 오언시」라는 의미로 쓰였다. 그리고 이 「오언시」와 그 이전 사이에는 단층이 가로놓여 있다. 이 오언시를 언제부터 「고시」라고 부르게 되었는가(「의고」의 대상으로 삼았다)」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의고」란 모델이 되는 시에 대해 마치 주인공이 옛날에 있는 것처럼 의작(擬作)하는 것이다. 이 행위은 「고시」의 의미 전환과 비슷한 시기인 3세기에 「시제(詩題)」로서 발생한다. 육기(陸機, 261~303)의 「의고시」 역시 나중에 장르가 된 것일 것이다. 「위나라 완적에게 배운다」는 식의 방식과도 관련된다.  5세기가 되면 「의고시(擬古詩)」가 등장한다. 개별적인 모방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육조의 살롱문학으로서 영물시가 요구되었을 때 그 중 하나에 「고의」도 있었다. 「고의」는 창작의지(意)나 문체(体)를 촉발한다. 「고의」는 「의고」와 달리 현실을 옛스럽게 하여 비현실적 것으로 전환한다. 이것은 새로운 타입의 인간 관계나 도읍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변경, 그리고 자전의 발로 등, 종래의 「의고」에서는 표현할 수 없었던 이야기의 수요를 채웠다.
 위와 같은 표현형태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말에 있어서 「고(古)」의 의의가 공통적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 「고」를 포착하는 인식의 변화에 오히려 주목해야 한다. 그렇다면 육조시에서 「고」란 어떻게 인식되고 있었을까?「고시」는 근대적인 문장과는 달리 수사적으로도 민간가요와 연속된 것이었다. 진왕조가 재흥되고 수사가 발전하고 소재도 다양해져 간다. 지금까지를 어떻게 파악하면 좋은가라고 하는 가운데, 「지금(今)」과 「고」라고 하는 의식의 발현은, 「의(意)」(모티브)나 「체(体)」(스타일)로서의 「고」의 발생도 재촉하였다. 「지금 여기」의 밖이나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세계의 기점은, 「쓰여진 것」의 외재성을 이용하는 전제를 담보한다. 육조시대에 근체시가 성립했어도 고체시는 계속 지어졌다. 근체시로는 건져낼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발견은 곧 「고」의 재발견, 재정위였다. 증답시도 서로를 「옛 시」의 등장인물에 빗댄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장르였다. 「고」라는 외부는 수사세계나 기법의 발전과 달리 외부로서 문예상 여러 취수장으로서의 「고」가 설정된다.
 사이토 씨의 보고는 이상과 같은 것이었다. 어떤 개념은 역시 차이화를 통하지 않으면 정위되기 어렵다. 근대부터 반사적으로 정위된 「고」가 외부인 동시에 보편적 기점으로서 언제라도 현상(現状)과 외부로서 접속된다. 예를 들어 일본의 와카가 통시적 관점을 얻게 된 것은 헤이안 후기로 여겨지는데, 이러한 인식변경을 야기했던 구조에 대해서도 본 보고를 통해 배우는 바는 클 것이다.
 
(유미야마 신타로 교토대학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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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도비타 히데노부  도쿄대학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