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Events / Reports>동아시아 고전학의 프론티어 ―서기표현에서 보이는 것―
세미나

동아시아 고전학의 방법 제53회
동아시아 고전학의 프론티어 ―서기표현에서 보이는 것―

일시
2019년3월15일 (금) 14:00~, 16일(토) 10:00~
회장
도쿄대학 고마바캠퍼스 18호관 콜라보레이션 룸2
강사
David Lurie(콜롬비아대학), 야다 쓰토무[矢田勉](도쿄대학), 사사키 다카히로[佐々木孝浩] (게이오기주쿠대학부속연구소 시도분코), 다무라 다카시[田村隆] (도쿄대학), 가나자와 히데유키 [金沢英之] (홋카이도대학), 도쿠모리 마코토[徳盛誠](도쿄대학), 미치사카 아키히로[道坂昭廣] (교토대학), 사이토 마레시[齋藤希史](도쿄대학)

기본정보

개요

 2019년 3월 15일(금)과 16일(토) 양일에 걸쳐 본 가켄을 매듭짓는 연구집회가 개최되었습니다.
 본 가켄 멤버와 함께 David Lurie선생님, 야다 쓰토무[矢田勉] 선생님, 사사키 다카히로[佐々木孝浩] 선생님을 모시고 상대, 중고, 중세, 근세의 네 세션을 설정하여 토의를 진행하였습니다.

 상대 세션 사회: 미치사카 아키히로[道坂昭廣] (교토대학)

  David Lurie(콜롬비아대학)
   「고대문학사의 전환기―Motive, Means, and Opportunity」
  야다 쓰토무(도쿄대학)
   「일본 상대표기사의 인식 방법」

 중고 세션 사회: 가나자와 히데유키 [金沢英之] (홋카이도대학)

  사사키 다카히로(게이오기주쿠대학부속연구소 시도분코)
   「정설로부터의 이탈―『겐지모노가타리』「벳본」을 생각하며―」
  다무라 다카시[田村隆] (도쿄대학)
   「『겐지모노가타리』 사본의 표기」
 
 중세 세션 사회: 다무라 다카시(도쿄대학)

  가나자와 히데유키(홋카이도대학), 도쿠모리 마코토[徳盛誠](도쿄대학)
   「중세의 『니혼쇼키』 주석―― 한자 세계와 목소리 세계의 사이에서」

 근세 세션 사회: 도쿠모리 마코토 (도쿄대학)

  미치사카 아키히로(교토대학)
   「일본에서 한시를 짓는 것―쓰사카 도요(津坂東陽) 『야코시와(夜航詩話)』로부터」
  사이토 마레시[齋藤希史](도쿄대학)
   「의고와 화음――근세 일본한시의 지향으로서」
 
 종합토론 사회: 바바 사유리[馬場小百合](데이쿄대학)

주최

동아시아 고전학의 차세대 거점 형성―국제연대에 의한 연구와 교육의 가속화

당일레포트

 이번 연구집회는 가켄「동아시아 고전학의 차세대 거점 형성」의 최종 이벤트에 해당하는 것으로 상대・중고・중세・근세의 네 세션를 두고 각 세션에 발제와 토의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발제자는 상대가 데이비드 루리 선생님과 야다 쓰토무 선생님, 중고가 사사키 다카히로 선생님과 다무라 다카시 선생님, 중세가 가네자와 히데유키 선생님과 도쿠모리 마코토 선생님, 근세가 미치사카 아키히로 선생님과 사이토 마레시 선생님께서 각각 담당하셨습니다. 모든 세션이 끝난 후에는 바바 사유리 선생님의 사회로 종합토론도 이루어졌습니다. 
 대학원생 참가자는 담당 분야를 정해 리포트를 집필하였습니다. 여기에 참가자의 리포트를 게재하고 당일 토론의 개요를 보고합니다. 게재한 것은 리포트의 일부이며, 게재할 때 다소 표현을 바꾼 부분도 있습니다.  
 
 
【상대 세션】
 
《개요》
 
 루리 선생님의 발제는 상대 일본의 문자 보급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루리 선생님은 『일본서기』에 있는 문자에 관한 기술을 근거로 하면, 문자가 시대의 흐름에 비례하는 형태로 보급해 갔다는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지만, 고고학에서는 7세기 중엽부터 문자가 급속히 보급되었다고 여겨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후, 전근대의 중동 및 유럽에서의 책자본 보급 상황을 참조하여 실제의 문자 보급은 고고학에서 제시된 것처럼 폭발적인 것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형사 드라마에서 범인을 특정할 때에 동기, 수단, 기회의 세 조건이 갖춰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처럼, 상대 일본에서의 문자 보급도 수단과 기회만이 아니라, 동기가 있어야만 비로소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점을 논하셨습니다. 
 야다 선생님은 상대의 표기 연구에 관해서 현재 연구의 문제점과 통사적인 표기사를 생각할 때의 어려움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우선 연구상의 문제점으로서 기키만요(記紀万葉)처럼 전적이 문자 자료의 중핵으로서 파악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항구적으로 유지될 것을 기대하여 만들어진 전적만을 특권화하는 것이 아니라, 목간처럼 목적을 달성하면 파기되는 「소비되는 문자」 자료도 포함해서 종합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상대와 중고 이후를 연속적으로 파악하는 통사적인 표기사를 생각할 때의 어려움으로서 상대의 변체한문(変体漢文)을 한문법에 의거해 쓰여진 중고 이후의 변체한문과 나란히 생각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 만요가나가 히라가나로 변화한 것의 필연성을 설명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요가나에서 히라나가로의 변화에 관해서는 목간을 대신하여 종이가 사용되는 등, 외적인 요인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토론에서는 문자의 역사에 있어서, 합리성은 반드시 결정적인 동기가 될 수 없다는 점, 그것은 문자가 가진 강한 규범성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여겨진다는 점이 제시되었습니다. 또한 질의응답 가운데 두 분 선생님은 문자해독능력을 생각함에 있어서 텍스트가 작성되는 문맥과 장르를 고려해야 한다는 점, 식자층의 확대뿐만 아니라, 식자 레벨의 평준화와 고도의 문자해독능력을 가진 것에 대한 사회적 평가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참가자 리포트:세키야 유이치(홋카이도대학 공동연구원)》
 
 루리・야다 두 분은 모두 현대 일본어의 대극에 고대 문헌을 두고, 전자로부터 후자로의 점진적 그리고 일방적인 〈진보〉를 상정하는 듯한 표기사 기술에 비판적이다. 일본열도에서의 문자사용에는 명확한 〈전환점〉이 있고, 히라가나문의 확립과정에서도 〈비약〉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회장에서 여러분들로부터 지적이 있었듯이, 문자 표기는 합리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고 규범에 강하게 구속되는 보수적 성질을 가진다.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이 보수성 때문에 드물게 일어나는 표기 방법의 변화는 점진적이지 않고, 급격할 것이다. 오늘날에도 정도의 차는 있어도, 타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문자를 사용하는 사람은 타자와 공유하는 〈규범〉을 의식한다. 그 때문에 시대가 변할 때 〈규범〉이 일방적으로 변경되는 경우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에 따른다 (종전 후 국어개혁에서의 구자・구가나의 개폐 등은 그 예). 질의 응답 중에도 루리 씨가 도노 하루유키(東野治之) 씨의 연구를 참고하면서 8세기 초에 목간의 서체가 육조풍에서 초당풍으로 단숨에 바뀐 예를 들었다. 사이토 마레시 씨의 결론처럼, 본래 기록하는 행위는 살아있는 인간에 대해서 타자성을 가지고 있고, 한자만이 아니라 문자는 언어에 대해 본질적으로 「타자」이다. 언어 획득은 신체적인 것이고, 그 변화는 화자의 세대교체에 의한 점진적인 것이 되기 쉽다. 그에 비해 「타자」인 문자와 그 표기의 역사는 사회의 변화가 그렇듯이 보다 복잡하고 불규칙적인 전개를 보여 주게 된다. 때문에 문자・표기를 구두언어에 대해 종속적인 존재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참가자 리포트:무천(도쿄대학 박사과정)》
 
 필자는 중국 육조시대 지괴소설(志怪小説)의 형성문제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데, 연구방법도 역사사회학적인 시점에서 착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설연구도 역시 야다 선생님이 상대 표기사에 대한 총체적인 연구가 아직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것과 「연속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단층이 있는 당 이전의 「소설」과 그 이후의 소설의 전개를 어떻게 관련지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것과 같은 난국에 직면해 있습니다. 역사사회적인 방법이라고 하면, 이른바 루리 선생님이 말씀하신 「기회」라는 요소를 중요시하고, 때때로 소설이라는 장르 전체의 특징에 시선이 가기 십상이어서 하나 하나 작품의 개성을 놓치기 쉽습니다. 이러한 때에 소설 이외에도 작자의 의도를 전달하기에 최적의 문학 형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소설이 선택되었는지, 또한 「역사」를 전하는 것이 소설의 최초의 역할이었다고 한다면, 왜 시문과 같은 「실용적」이지 않은 소재도 내용에 포함되는지 「동기」에 대해 묻는다면, 개체의 작품과 소설 전체의, 기복 있는 전개와의 관계를 더욱 치밀하게 검토하는 것이 가능해 질 것입니다. 또한 소설의 성질에 있어서의 단층을 어떻게 연결할 지에 대해서 야다 선생님이 히라가나의 탄생에 대해서 내적 요인뿐만 아니라, 외적 요인도 포함해서 생각하는 것에서 힌트를 얻어 「문」으로서의 소설 그 자체만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 낸 「사람」의 집단성의 변화나 그것을 전하는 매개의 변화 등 문학 주변에서 찾는 것도 중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最終イベント1.JPG
 
 
【중고 세션】
 
《개요》
 
 사사키 선생님의 발제는 『겐지모노가타리』의 전본의 계통분류에 대해서 기존 분류의 유효성을 검증하는 동시에 분류를 위한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사키 선생님은 먼저 이케다 기칸(池田亀鑑)에 의한 청표지본(靑表紙本), 가와치본(河内本), 별본(別本)의 세 분류를 가와치본(河内本)과 별본(別本)의 두 분류로 수정하는 견해가 있다는 점을 언급하고 이케다에 의한 삼분류설이 청표지본을 「데이카본」으로 고치면 문제없이 통용된다는 점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데이카본에도 가와치본에도 속하지 않는 것을 한데 묶은 「별본」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점, 특히 데이카본이나 가와치본이 성립하기 이전의 고전본을 별본 가운데 식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또한 이누마산엔푸쿠지(飯沼山圓福寺) 소장본에 데이카본과 가와치본에는 보이지 않는 옛 변체가나가 사용되었다는 점, 그것과 같은 가나를 사용하는 것이 별본으로 분류되어 있는 전본 가운데 여럿 존재하는 점을 언급하면서 고전본을 식별하는 방법으로서 변체가나의 종류에 주목하는 방법이 있다는 점을 논하셨습니다. 
 다무라 선생님은 『겐지모노가타리』의 사본에 있어서의 표기에 관한 발제로서 세 가지 문제를 제시하셨습니다. 첫번째는 하나의 전본에 권별 표기가 다르다는 점에 대해서이며, 오시마본에도 「人々」의 오도리지(踊り字) 표기법이나, 한자표기 혹은 히라가나의 선택을 둘러싸고 권별로 어떠한 표기법을 사용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일정의 경향이 보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번째는 다른 계통이 포함된 혼성본에 있어서의 권의 구성에 대해서이며, 어떠한 권이 어떠한 계통에 속하는가에 관해서 혼성본에 공통의 경향을 발견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 등을 지적하셨습니다. 세번째는 권명 표기에 대해서이며, 「아카시(明石)」를 「아카시(赤石)」, 「미오쓰쿠시(澪標)」를 「미오쓰쿠시(水衝石)」처럼 쓴 도쿄대학 총합도서관본의 권명 표기가 무발무간기 정판본이나 판본『판스이이치로(万水一露)』에도 보인다는 점을 말씀하셨습니다. 
 토의에서는 당시의 독자가 읽은 텍스트를 명확히 하는 것이 작품의 수용을 생각할 때 불가결하다는 점과 표기의 불안정이 개인의 표기법 때문인지 그 시대의 규범 때문인지를 판단할 때, 통계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 논의되었습니다. 또한 어떠한 필자에 의해 사본이 쓰여졌는가라는 문제와 서사(書写)할 때, 자의적으로 고쳐 썼을 가능성 등도 논의되었습니다.   
 
 
《참가자 리포트:아서 데프란스(파리국립고등연구원)》
 
 필자에게는 문자 연구의 성과를 문학 연구에 응용하는 가능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할 역량이 없지만, 그 평가를 시도해 보고자 한다. 문자 연구의 큰 이점의 하나로서 그러한 연구가 「텍스트」의 역사성을 두드러지게 하는 움직임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것을 통해, 확고하고 영구불변의 「클래식」, 「캐논」라고 생각하기 쉬운 텍스트는 뭔가 구체적인 흐름 안에서 생겨난 것으로서 파악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추상적인 텍스트의 우세가 무너져 구체적인 텍스트의 다양성이 파악되게 되는 것이다. 『겐지모노가타리』를 논했던 두 발표는 바로 이러한 시점에 서서 고전 중의 고전인 『겐지모노가타리』에 대해서 새로운 시점을 경험하도록 하고 있고, 정착한 『겐지모노가타리』의 이미지를 재고해 보는 기회를 준 것이었다. 더욱이 두 발표의 내용은 서로 보완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사사키 다카히로 선생님의 발표는 한마디로 말하면, 『겐지모노가타리』사본의 변체가나의 비교검토를 바탕으로 한 사본 분류의 재검토를 제창하는 것이며, 다무라 다카시 선생님의 발표는 사본 연구에 크게 공헌할 것으로 기대되는 한자와 가나의 사용 구분에 착목한 연구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본 연구의 기존 패러다임에 대한 도전과 앞으로의 분류방법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구축이라는 두 가지 방향성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두 발표는 대단히 흥미로운 내용이어서 연구자인 나에게도 얻을 것이 많았다. 예를 들면, 우리들이 연구자로서 시야에 둔 문학작품이라는 것은 문자해독능력이라는 총체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또한 그것을 그 주변과 관련되지 않는 일부로서 보는 방식은 학문상 내지는 편의상의 허구이라는 점이 명확하게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문학 범위에 들어있지 않는 몇 가지 특정 지식 없이는 문학 작품을 문자해독능력의 일부로서 다시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지식은 예를 들면 역사가에 의해 행해지는 사료비판을 가능하게 하는 시대배경과 문자해독능력의 배경지식이다. 말할 것도 없이, 문자에 관한 지식은 그 기초가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문학의 틀에서 파악하기 쉬운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문학과 문자해독능력이라는 두 가지 영역에 걸친 횡단적 개념도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종합적인 개념이 없다면, 두 분야 사이에 골이 생기기 쉽게 되고, 한편에서 얻은 성과를 다른 한편의 분야에 활용하기 어렵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최근 수 년간 일본의 학계에서 유행해 온 「문자 텍스트」와 같은 개념은 특정 흐름에서 생겨난 텍스트를 충실히 파악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귀중한 도구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참가자 리포트:기타가와라 에린(도쿄대학 박사과정)》
 
 사사키 선생님의 국보『겐지모노가타리에마키』는 헤이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순수한 텍스트라고 할 수 없다」는 지적이 마음에 걸려, 외람되지만 질문하였다. 사사키 선생님은 사이교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마보로시(幻)」를 보다 가치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국보 에마키를 비교대상으로 하였다고 웃으시며 말씀하셨지만, 역시 에마키라는 미디어 안에서의 고토바가키(詞書)은 어디까지나 『겐지모노가타리』라는 텍스트의 「발췌」라는 점을 강조하셨다. 시사적인 선생님의 답변 가운데 인상적이었던 것은 「에마키 연구자는 역시 그림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본문을 둔 연구가 더욱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메이지 초기에 시작하여 끊임없이 이어져 온 국보 『겐지모노가타리에마키』의 연구지만, 제작시기나 과정, 누가 누구의 시선을 의식하여 구상했는가 등의 고찰은 역시 그림의 구조나 채용된 모티브, 고토바가키(詞書)의 서풍, 종이 장식 등, 시각적 정보의 분석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본문을 언급한 연구도 있지만, 그것들은 문자 텍스트를 어떻게 회화화했는가, 무엇을 그리고 무엇을 그리지 않았는가라는 회화 텍스트의 의미생성 및 문자 텍스트와의 차이에 관한 것이 보다 많다는 인상을 받는다. 
 내가 아는 한 고토바가키를 여러 책들과 비교한 연구는 나카무라 요시오(中村義雄) 씨의 1954년의 연구 「겐지모노가타리에마키고토바가키 부제 원점제본과의 이문교합」(『미술연구』174호)이나, 다마가미 다쿠야(玉上琢弥) 씨의 1967년 논문 「겐지모노가타리에고토바에 대하여」(『여자대문학 국문편』19호)를 들 수 있다. 나카무라 씨의 연구가 이케다 기칸 씨의 『겐지모노가타리 대성』의 간행과 같은 시기에 발표되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또한 다마가미 씨는 국보 에마키의 고토바가키와 청표지본 본문에서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경우에 그것을 가와치본, 별본과 비교한 『겐지모노가타리 대성』 혹은 청표지본을 전제로 한 방법론을 취하고 있다. 예를 들면, 「우스구모(薄雲)」단간에 관해서 말하면, 에마키 고토바가키에 오시마본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경우, 그 부분이 가와치본, 별본의 요메케본, 호사카본과 일치할 경우는 그 취지가 쓰여 있다. 한편, 청표지본과 이문이 확인되어도 다른 책 가운데 일치하는 본문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는 특히 언급되어 있지 않다. 즉, 오시마본과의 비교에 통해서 해명되지 않는 부분도 크다는 말이 된다. 덧붙여 말하면,  『겐지모노가타리별본 집성』의 간행이 시작된 헤이세이 원년 이후에도 고토바가키에 관한 논문은 발표되었지만, 에마키 고토바가키 전체를 살펴보고, 특정계통과 별본 혹은 특정본과의 관련성을 지적한 것도 아직 없는 것 같다.  
 이번 세미나에서 선생님들의 발표를 듣고, 최선본(最善本)으로 여겨지는 청표지본과 먼저 비교하는 방법론의 문제성 및 그 후대의 텍스트와 비교하는 함으로써 누락돼  버리는 것도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기존의 방법론을 텍스트에 적용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텍스트로 되돌아가서 방법론을 재고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最終イベント2.JPG
 
 
【중세 세션】
 
《개요》
 
 중세 세션에서는 『니혼쇼키』의 주석에 대해서 이치조 가네요시(一条兼良)의 『니혼쇼키찬소(日本書紀纂疏)』와 요시다 가네토모(吉田兼倶) 의 『니혼쇼키진다이노마키쇼(日本書紀神代巻抄)』을 주요 대상으로 하여 논의하였습니다. 
 가네자와 선생님은 헤이안 시대 이후, 한문으로 쓰여진 『니혼쇼키』를 어떻게 일본어로 읽을지가 『니혼쇼키』의 주석을 둘러싼 중심적인 문제였던 것에 비해, 『찬소』에서는 한문으로 쓰여진 서적으로서 『니혼쇼키』를 읽으려는 태도가 파악된다는 점, 그것에 대해  요시다 가네토모의 『진다이노마키쇼』에서는 진다이의 「자연의 문자(自然ノ文字)」를 한자로 바꾼 것으로서 『니혼쇼키』가 인식되고 있다는 점, 그 발상이 한문훈독의 과정을 역전시킴으로써 생겨난다는 점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진다이노마키쇼』의 「자연의 문자」라는 사고방식이  구카이(空海)의 사상을 이어 받아서 나타난 것 같다고 논하셨습니다. 
 도쿠모리 선생님은 먼저 『찬소』에 대해서 한자서술로서의 『니혼쇼키』를 주석의 대상으로 한 후에 유교설, 도교설, 불교설과의 조응에 의해 각각의 서술의 의미내용을 해명하는 방법이 취해져, 형상의 차원, 음양이기의 차원, 그리고 불교설에서 도입한  「일심(一心)」의 차원, 이러한 세 차원으로부터 『니혼쇼키』의 서술이 파악된다는 점을 보이셨습니다. 이어서 『진다이노마키쇼』에 대해서 한자표현의 의미내용을 해명한다는 『찬소』의 주석 태도가 계승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반면, 『찬소』와는 달리, 『니혼쇼키』의 서술을, 사태를 기술한 것으로서가 아닌 사태 그 자체로서 파악하는 듯한 태도가 있다는 점을 논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책의 관계에 대해서 『찬소』에서는 『니혼쇼키』의 서술이 진다이의 사태를 나타내는 것이었던 반면, 『진다이노마키쇼』에서는 사태로서의 진다이를 『찬소』로부터 배우고, 사태를 반영한 것으로서 서술을 파악하였다고 하셨습니다. 
 토의에서는 헤이안 시대 이후의 주석에서 일본어 세계로서의 진다이를 상정한 반면,  『찬소』에서는 한자 세계로서의 진다이가 제시되었고, 게다가 『진다이노마키쇼』에서는 한자를 포섭하는 보다 고차원의 세계를 상정하여 「자연의 문자」라는 것이 나왔다고 여기진다는 점을 확인하였습니다. 또한 「자연의 문자」가 한자에서 나타난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한 문제와, 가네토모의 사상형성에서의 밀교와 실담학의 평가에 대해서도 논의하였습니다. 
 
 
《참가자 리포트:다카오 유타(홋카이도대학 박사과정)》
 
 가네토모의 「자연의 문자」관의 기반에는 진언밀교적 언어관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가네토모의 언설 가운데에 밀교나 실담학의 영향이 보인다는 점으로도 판단할 수 있는데, 『니혼쇼키진다이노마키쇼』 모두의 문장을 통해서도 말할 수 있다. 
 
 즉 신도는 씨앗이고 불교는 꽃과 열매이며, 문자는 가지와 잎이다. 만약 문자가 없다면, 불법의 정리를 나타낼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면, 꽃이 피고 열매가 맺은 후에 이것이 무슨 나무인지 아는 것과 같다. 만약 꽃과 열매, 가지와 잎이 없다면 즉 신도의 씨앗도 나타낼 수 없다. 저 불법이 신도에서 나왔기 때문에 우리나라로 돌아온다는 것은 나뭇잎이 흩어져 본래의 대지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위의 문장은 이른바 불교화실설 혹은 근엽화실설이라고 불리는 언설로 일본의 신도를 씨앗, 인도의 불교를 꽃과 열매, 중국의 한자를 가지와 잎에 대응시킨 것으로 신도의 본원성을 말하는 동시에 가네모토의 문자관을 이해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밑줄 친 부분은 그 문자관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는 문장이다. 문자가 없다면, 「불법의 정리(仏法ノ正理)」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언뜻 당연한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일반적으로 불교에 있어서 이(진리)는 말로 나타낼 수 없다고 여겨진다. 가네토모로의 영향이 지적되는 선종도 「불립문자(不立文字)」로 알려져 있듯이 깨달음의 경계에 문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언어(진언)을 수습하는 것이 진언종이다. 가네토모의 「만약 문자가 없다면, 불법의 정리를 나타낼 수 없을 것이다(若無文字、則仏法ノ正理ハ不可顕ゾ)」라는 문자관은 밀교적 언어관에 근거한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 
 가네토모『니혼쇼키진다이노마키쇼』의 다음 문장을 보자. 
 
 태자가 말하길, 신도는 천지를 서적으로 삼고, 일월을 증명으로 삼는다. 천지의 사이에 만물이 변화하고, 사계가 운동하며, 봄과 가을이 오면 꽃이 피고 잎이 떨어지고, 생노병사의 이치가 자연히 나타나는 것이니 천지는 한 권의 신서이며, 그 증명은 일월이다.   
 
 「생노병사의 이치」가 「자연히 나타나」기 때문에 「서적」이라는 것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우나, 밀교적 언어관을 통해 보면 이해하기 쉽다. 만물은 구별・인식되는 차별상(差別相)이니까 문자이며, 동시에 문자로서의 만물은 생멸이라는 진리(법)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법신의 실상이다. 그것은 바로 진언(혹은 진언을 구성하는 문자)이며, 가네토모에 있어서는 「자연의 문자」일 것이다. 「천지(의 사이)」에는 그러한 문자(만물)이 두루 퍼져 있기 때문에, 「천지(의 사이)」를 「서적」이라고 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상을 바탕으로 가네요시와 가네토모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가네요시・・・서술된 진다이에는 유・불・도 삼교와 굥유하는 이치가 나타나 있어서 그것은 일심의 전개로 하고 있다.
 가네토모・・・『니혼쇼키』가 「신서」인 이유는 이(일심)의 표현인 「자연의 문자」로 쓰여진 서적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니혼쇼키』도 쇼토쿠 태자(聖徳太子)의 손으로 한 글자 한 글자 한자로 옮긴 것이기 때문에 『니혼쇼키』의 한자도 이와 일치인 것이 된다. 따라서 「이니시에(古)」의 해석처럼 어의에 앞서 사태(일심의 표현)을 직접 지시한다는 사고가 성립할 수 있다. 
 
 도쿠모리 선생님은 가네요시와 가네토모를 비교하여 가네요시는 『니혼쇼키』의 서술표현이 사태(그것은 일심의 전개・유출로 하고 있다)를 나타내고 있다고 파악하고, 거기에서는 표현된 진다이를 추구하고 있는 반면, 가네토모는 사태로서의 진다이를 추구하고 있지 않은지에 대한 고찰을 보여주셨다. 가네토모가 일심의 전개로서 파악한 사태로서의 진다이를 서술표현 그 자체로 추구하려는 가네토모의 자세는 밀교적 언어관을 통해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참가자 리포트:마에다 료타로(홋카이도대학 박사과정)》
 
 이 세션의 논의를 통해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가네토모의 「자연의 문자」론과 옛 말과 문자를 둘러싼 근세이후의 사상과의 관련에 대한 것이었다. 가네자와 선생님이 마지막에 「「자연의 문자」론의 향방」으로서 게이츄 (契沖) 『와지쇼란쇼(和字正濫鈔)』나 모토오리 노리나가 (本居宣長) 『고사기전(古事記伝)』에 보이는 언어・문자관을 소개하셨는데, 그 외에도 근세라는 시대에는 가네토모가 『니혼쇼키』주석 중에서 상정했던 「자연의 문자(진다이의 문자)」에도 통하는 듯한〈진다이의 문자〉를 표방하는 문자와 그것으로 쓰여진 〈신서〉가 실제로 작성되기도 했다. 여기에서는 안에이 연간에는 성립되었다고 여겨지는 『호쓰마덴키』를 중심으로 한 진다이문자문헌을 일례로 들고자 한다. […]
 가네토모의 「자연의 문자」론에서는 한자와는 다른 소리와 문자의 세계를 찾아 그것을 『니혼쇼키』의 배후로 상정하였으며, 노리나가는 소리를 나타내는 『고지키』와 소리를 나타내지 않는 『니혼쇼키』라는 대립 가운데에서 소리의 세계를 『고지키』에서 찾고자 했다. 그것에 대해 『호쓰마덴키』는 소리의 세계를 『니혼쇼키』도 『고지키』도 아닌 것에서 찾아 그것을 현실에 존재하는 〈신서〉로서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호쓰마덴키』도 쓰여진 것의 반대편을 추구하는,  그때까지의 행위의 연장선 위에 놓일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다만, 가네토모의 「자연의 문자」론과 비교한다면, 당연히 차이도 존재한다. 알기 쉬운 차이 중 하나로서는 호쓰마 문자가 (근세 이후에 작성된 유사한 진다이 문자의 대부분도 비슷하지만), 50음에 대응한 표음문자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가네토모가 상정했던 「자연의 문자」는 한자와 일대일로 대응하는 표어문자이며, 그 수는 15360자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 「자연의 문자」와 한자와의 대응에 의해 「신어」가 「자연의 문자」를 통해서 한자로 바뀔 수 있다. 그것이 가네토모에 있어서의 「삼교일치」의 증명이었다(그리고 「삼교일치」를 추구하려는 의식 자체는 가네요시의 『니혼쇼키찬소』에서 섭취된 것이었다). 한편 호쓰마 문자는 「자연의 문자」와 같이 한자와 대응하지 않는다. 한자 세계에 대한 시선의 차이가 여기에서도 읽을 수 있는 것 같다.
 이상, 근세의 진다이문자문헌 『호쓰마덴키』에 대해서 간략하게 서술했다. 이러한 진다이문자문헌은 근세 이후 왕성히 만들어져 현대에 이르기까지 은연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들이 문자와 소리를 둘러싼 중세의 가네토모・가네요시의 사상, 혹은 근세의 게이츄・노리나가의 사상과 어떠한 공통점과 독자성을 갖는가에 대해 특히 이번 세션의 「자연의 문자」의 화제를 출발점으로서 흥미롭게 생각한 것이다. 근세에 『고지키』중시의 기운이 높아졌던 이면에서 나온 진다이문자의 세계에도 중세로부터 계속된 문자와 소리를 둘러싼 문제라는 관점에서 파고 들 수 있지 않을까―막연하지만 그렇게 생각했다. 
 
 
最終イベント3.JPG
 
 
【근세 세션】
 
《개요》
 
 미치사카 선생님의 발제에서는 쓰한에 출사했던 쓰사카 도요(津阪東陽)의 『야항시화(夜航詩話)』에 초점을 맞춰 근세 일본에서 한시를 짓는 것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지에 대해 논하셨습니다. 미치사카 선생님은 『시화』가 초학자를 대상으로 어떻게 시를 짓는지를 서술한 책이라고 말씀하신 뒤 중국에서 만들어진 한시를 전부 좋다고 하지 않고 배워서는 안되는 것을 제시하거나 일본의 지명을 중국풍으로 표현하는 것을 경계하거나 와카나 한시의 구분 등을 서술하고 있다는 점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도요가 중국인도 포함한 한시의 작자층이 올바르게 이미지화하는 것을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 도요에 있어서 한시를 짓는 것은 동아시아의 교양 세계에 참여하는 동시에 일본을 전하는 것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이토 선생님의 발제는 근세 일본에 있어서의 의고시(擬古詩) 제작와 화음 (華音)의 학습에서 당시의 한시 지향을 발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이토 선생님은 의고라는 방법이 근세 일본에서의 오규 소라이의 일파뿐만 아니라, 중국의 육조시대에서부터 행해져 왔다는 점을 보이시고, 의고란 기존의 시 세계에 가담하는 행위였다는 점, 따라서 근세 일본에 있어서의 의고시는 또한 중화를 모방하려는 「의화(擬華)」시이기도 했다는 점을 논하셨습니다. 이어서 소라이파에 있어서의 화음 학습도 또한 의고와 마찬가지로 중화로의 지향을 보이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점, 당시의 중국 발음이었던 화음을 대신하여, 음성은 잃어버렸지만 불변의 음율이 추구되었다는 점을 논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이 아닌 시대와 여기에서 말하지 않는 소리를 지향하는 것이 세계의 기점을 모색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점, 그 때 쓰여진 것을 매개로 하여 그 반대편에 불변의 것을 발견해 내고 있다는 점을 말씀하셨습니다.
 토의에서는 한시를 짓는 것이 말의 운용능력을 배양하는 것이었다는 점과 현실에서 허구로의 도피가 아니라는 인식에서 의고시의 제작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 대해서 확인하였습니다. 또한 시작에 대한 태도가 중앙과 지방이 달랐을 가능성, 서적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사대부와 실태와의 차이를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도 이야깃거리가 되었습니다. 
 
 
《참가자 리포트:성고아(교토대학 박사과정)》
 
 미치사카 선생님의 발표를 듣고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쓰사카 도요의 한시에 대한 인식이다. 그는 일본인이 지은 한시와 중국이나 중국인의 작품을 견주는 것을 생각하여 좋은 한시를 짓는 규칙을 강조하고 타자(동아시아적 지식인)에 일본을 전하는 한시를 목표로 하였다. 거기에는 독자는 일본인만이 아니라는 의식도 있고 올바른 시를 짓기 위해서 올바른 문자・올바른 말을 사용해야 하는 것 등, 말을 정확하게 사용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내가 생각했던 것은 일본의 지식층이 한문을 문체로서 저작할 때, 독자로서 일본인 이외, 동아시아의 지식인도 상정하고 있었는가라는 점, 그리고 그러한 한문저작은 중국이나 중국의 작품과 견주는 것을 의식하는 성격이 있었는가라는 점이었다.  
 나의 연구대상인 에도 후기의 의학고증학파의 사람들은 한문으로 많은 의서고증의 저작을 남겼다. 의학고증학파는 에도의 유학계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의사라는 특이한 신분을 갖고 있었으며, 당연히 지식층의 학술수준에 도달해 있었다(쓰사카 도요의 부친 보쇼(房勝)도 원래 의사였다. 도요는 15세부터 나고야에서 의학을 공부했지만 3년만에 의사의 길을 접고, 유학자의 길로 나갈 것을 결의했다고 한다. 당시의 의사와 유학계의 관련이 조금 보인다). 의학고증학파의 저술은 양수경(楊守敬)의 활동으로 중국에 수입되었는데, 당시의 중국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더욱이 그들의 고증학적 연구수법은 중국 의서고증・해석의 발전에 있어서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 의학고증학파의 의서고증은 어디까지나 텍스트 비판을 주로 하는 문헌학적 저서이며, 문학작품처럼 일본을 표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청조고증학의 풍조는 서적을 매체로 하여 일본 유학계에 있어서 고도의 발전을 이루었고, 거기에서부터 의학의 고증학파를 탄생시켜, 의학고증이라는 독특한 문헌비판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그 성과가 또한 중국에 전해져서 중국의 의학사에 영향을 주었다(엄밀한 표현은 아니지만, 현재의 중국에서 그들의 저작은 문자 그대로, 많은 중국전통의학서와 같은 책장에 꽂혀 있다). 동아시아에 있어서의 그 환류 현상은 일본인이 한문을 통해서 일본적 학술 수법을 전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한문이라는 동아시아의 서기방법을 사용하여 동아시아의 지식인으로의 발신이 만들어진 실례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앞으로 나의 연구를 진행할 때에도 이러한 사고와 연구시점을 취하여 의학고증학파의 전술을 검토할 것이다
 사이토 선생님의 발표 내용은 유익하였던 동시에 하나의 문제를 실감하였다. 내가 아는 한, 나를 포함해 많은 중국인 유학생(연구자)들은, 일본에는 자신이 연구하는 분야의 소장자료가 많고 한문으로 쓰인 관련 저술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한문을 읽을 수 있다면 그만큼 연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분야의 사상적 배경은 모든 연구에 있어서도 무시되어서는 안된다. 두 분의 근세 세션 선생님의 발표는 사상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논의였고 소라이학을 논하지 않고서 에도시대의 학문을 탐구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의학문헌이라고 해도 에도 후기의 고증파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큰 자극을 받았다. 앞으로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사상사 관련 공부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참가자 리포트:장령운(교토대학 박사과정)》
 
 나카이 지쿠잔의 생각에서 「화음정통(華音精通)」과 「작시감능(作詩堪能)」은 다른 것으로 여겨졌었다. 화음을 습득한 사람이 자연히 좋은 시를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답대출자우서」(권11)에서 지쿠잔은 아래와 같이 교수법을 설명하고 있다. 「적선평일, 솔초학지사, 사기다독사당송명시, 선기기성율, 기소제작, 무령역해, 유자구괴법, 편실례제자. 첩가승삭, 대기운용약숙후, 연후리론, 격조, 심이도습초절위계. (積善平日、率初學之士、使其多讀四唐宋明詩、先記其聲律、其所製作、務令易解、有字句乖法、篇失體制者、輒加繩削。待其運用略熟後、然後理論、格調、深以蹈襲剿竊為戒。)」
 이 사색 넘치는 교수법에 대해서 말하면, 시의 창작은 지력을 활용하는 것이며 지적생산성을 요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측보」의 음율에 따라는 것이 기초적인 규칙이다. 그것에 더하여 지식, 재능 및 교양(학양) 등도 요구된다. 여기서 말하는 교양은 경(経)・사(史)를 섭렵하는 것에 의해 체득되는 견식이다. 
 선생님들의 생각에 따르면 에도시대의 시인은 한시를 창작할 때, 언제나 읽는 대상을 명확히 의식하고 있었다. 즉, 자신이 쓴 한시는 한정된 독자들 사이에 유포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한자문화권 전체의 독자에게 「보이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자각을 바탕으로 시인들은 중국에서 정칙이었던 작시규칙에 따라 「올바른」 한시를 지으려 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올바른」 한시란 문자의 음운, 전고, 내포하는 감정표현이 중국 한시와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 미치사카 선생님이 지적하신 대로, 이른바 「올바름」은 「말이 갖는 이미지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 및 「사상(事象)을 올바르게 표현하는 것」이다. 게다가 중국 한시에 대해 올바른 이해와 올바른 표현을 추구하는 것도 「올바름」의 한 측면이다. 따라서 중국 한시의 「이미지」 및 「문자」를 올바르게 이해할 뿐만 아니라, 「올바른」 시를 짓는 때에는 「성률」도 필요불가결한 기초로 인식되었다. 즉, 시의 외재성과 내면성의 올바름에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검토해 보면, 나카이 지쿠잔의 『시리쓰쵸(詩律兆)』에 기술된 시보는 초심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시의 표준화를 꾀하고 시의 「올바름」을 객관적으로 추구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표준을 정하는 것은 시를 지을 때에 가장 중요하다고 나카이는 생각했을 것이다. 즉, 시의 「율」의 올바름도 자신의 지식을 충분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개요집필・리포트 편집:도쿄대학 박사과정 도비타 히데노부)